jiu song
마주
-창작스튜디오 10기 비평문, 2026
글 유승아
여자는 밀랍과 피나무, 아마의 실로 짠 직물과 지점토라는 깨지거나 헐기 쉬운 질료를 소중히 다루면서도 그 속에 자기만의 흔적을 남기는 데는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흥미를 이끄는 대상에 대한 촉각적 호기심과 자신의 것을 만드는 차분함이 있었을 뿐. 그렇게 빚어진 모양들, 빚다가 흩어진 흐름들이 있고, 빚었다고 착각되는 형태들이 있고, 그 모양들은 실제로 무척 생생하고 단단한데, 점과 선과 면이 한데 모인 생김새들은 산산이 이루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1) 입체-이야기는 세부들과 사소한 사건들만이 오롯이 가득해 전면이 펼쳐져 있는 하나의 추상 회화와도 같아 본인다. 여자의 이야기에서는 모두가 배경이다. 심지어 여자조차도, 모두가 주인공이 아닌 코러스인 가운데, 무대의 질서는 느슨해지고 결말은 유예되며 이야기는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기다림과 망각 속에서 모든 시작이 탄생했다. 여자가 시작한 이야기는 이러했다.
ৎ୭
"천사는 관계에서 태어나." 여자는 피나무의 피부를 보며 말했다. 여자는 천사를 믿었고 여자가 믿었기에 천사는 존재했다. 그러자 천사가 다가와 그녀와 피나무 몸통 사이에 앉는다. 천사가 여자의 얼굴과 나무의 몸통 사이로 왔다 갔다 한다. 천사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날갯짓 소리가 멎는다. 그러자 여자의 손끝이 나무 어깨에 남은 상처에 닿는다. 여자는 흉터의 양감과 질감을 손가락 끝마디 안쪽 살갗의 무늬로 느낀다. 피나무의 가슴과 등과 배 부분이 어떤 형태를 지닐 수 있는지, 여자는 기다리고 있다 말했다. 마치 피나무가 스스로의 의지를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고요가 그리 지나갔다. 그러자 피나무는 라파엘을 뱉어냈다.
"라파엘은 약물이 담긴 작은 호리병과 물고기를 들고 다니지." 여자가 근래 빚은 형상은 대게 인간 근처에서 머물며 누군가를 지키거나 살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라파엘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가장 불쌍한 천사야." 여자는 날개 달린 생명체의 형상을 다듬었다. 또, 언젠가 실수로 깨뜨려버린 라파엘 조각의 잔해들을 가장 귀하다고 여겨진 황금색으로 세공하듯 칠했다. 그리곤 다리 하나가 사라진 책상에 깨진 조각들로 이루어진 가벼운 세계를 만들곤, 아틀라스에게 지키도록 했다. 게다가 여자는 해에 달궈지는 동안 느꼈던 감정 자체를 다시 전해주고 싶은 듯, 해를 통통하고 포근하게 데우는 찜기를 만들어 주었다. 익히면 익힐 수록 해의 껍질은 얇아지고 알맹이는 가득 차올랐다. 여자의 주물은 대게 마음을 기억하고 보살피는 신비한 것이었다.
"2는 존재하지 않는 숫자야." 허무맹랑한 소리를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는 자꾸만 쌍둥이를 탄생시켰다. 두 명의 천사, 두 개의 알, 두 개의 심장, 두 개의 하얀 벽돌 탑. 나란히. 하나인 것도 때때로 둘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고양이를 닮은 쥐라든지. 토비아스를 라파엘 옆에 두곤 손을 꼭 붙잡고 있도록 한다든지. 또 하나에 관해 말할 때도 꼭 둘을 말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수잔 길버트가 얼마의 무게와 밀도를 지녔는지에 관해. 여자가 믿는 세계에서 너와 나라는 관계는, 언제나 넘쳐흘러서 항상 과잉인 까닭에, 완성될 수 없는 듯 했다. 그래서 여자는 2를 믿지 않았다. 여자에게 둘은 비합리적인 수일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떠나려는 나에게, 여자는 금박으로 덮인 초콜릿 박스와 같은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작은 상자 조각을 선물로 건네며 말했다. "궤에 한 조각씩 금을 모으는 기분으로 칠했지. 금빛은 나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담았다는 의미야." 그 이후로 조각에서 떨어져 나온 금박은 사방으로 떨어져 이상한 시점과 지점에서 나에게 발견되었다. 하루는 조각을 넣어둔 옷 주머니를 만진 나의 손에서, 또 하루는 조각과 함께 놓였던 책의 모서리에서. 나는 늘 금박을 엉뚱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마주했다.
여자를 마주한 그 후로, 나의 삶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진실을 껴안은 채 계속된다.
ৎ୭
인간의 몸에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생명체. 포근하게 감싸안는 듯한 피나무. 아보카도 속살의 색 또 햇빛에 반사된 물살의 색. 서정성. 여자가 다듬은 입체의 조형성은 종종 의미를 알기 이전에 이미 감각적으로 설득된다. 눈이 먼저 반응하고 의미가 그 뒤에 따라 오는 방식이다. 입체를 하나의 전체로 먼저 인식하게 되는 까닭은 주인이 되는 재료나 색이 앞서 나가거나 빛을 받은 밝은 부분만이 강조되는 것 대신, 늘 입체 전체가 얄브스름하고 연하고 널따랗게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서 여자의 욕망과 꿈과 환상은 마치 가느다란 바늘에 비치는 캐모마일 차의 빛깔처럼 슬그머니, 나타나곤 한다.2)
꿈 이야기를 불러내려는 듯이 여자는 자신이 환상한 형을 빚는다. 나는 여자가 만드는 입체가 꿈 동굴과 같다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뒤늦은 기억이나 내면의 슬픔이라는 속된 감정을 귀하게 대하면서도 말로는 완벽히 표현되지 않는 미지의 심리적 장소를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만약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면을 고를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아마 나는 알 형태의 작업을 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입체-이야기는, 어떠면 알의 안쪽─꿈 동굴 속에서 아직 무엇이 될지 결정되지 않은 채, 형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가능성의 상태 속에서 이뤄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여자의 알은 마치 태초의 동굴 속,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흘러나올까?
입체-이야기에 관한 사실 관계는 제쳐두고 나는 이 신비롭고 다정한 서술자를 의미심장하게 생가할 수 밖에 없다.3) 여자가 매일 같이 일어났다 기울어지는 햇볕의 따듯함에 심취하고 천사에게 꿈을 갖는 서술자였기 때문에, 현상이나 사물의 생명력, 욕망과 꿈과 환상의 반짝임이 그의 입체-이야기에 암류처럼 흐른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야기는 세상을 구원하는 진실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운명적인 순간, 라파엘을 만난 병든 사람이나 여자를 만난 '나'처럼, 단 한 사람이 마주한 유일한 진실이 될 테다.
─
1)박솔뫼, 『영릉에서』 (서울: 민음사, 2025), 136 문장의 변용.
2)작가가 소개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일화다. 토카르추크는 가느다란 바늘에 스며든 캐모마일 차의 빛을 소설 속에 남기려 했지만,
맥락상의 이유로 끝내 지워냈다고 했다. 송지유는 그 얇은 노란색과 햇볕을 머금은 연약한 쇠, 그리고 자칫 스쳐 지나갈 만큼 미묘한 대비의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6년 1월, 작가와의 대화.
3)올가 토카르추크에 따르면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으로, 대상을 의인화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자신과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또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와 경험의 파편들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다정함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면밀히 바라볼 때 구현되며, 연민을 넘어 그 존재의 연약함과 시간성을 함께 감각하려는 정서적 태도를 의미한다.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 최성은 옮김 (서울: 민음사, 2023), 363-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