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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독과 우회 사이에서 자리잡기

-《졸리다 Zolida》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4, 심층비평

 

글   정현

 문득 팬데믹 이후 지구상에서 지배종이 한국인일 것이라는 예측은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유학 시절을 떠올려보면 한국 유학생은 현지 대학 입시를 위해 수능 시험을 준비하듯 임했고 학교 생활 역시 심급의 경쟁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현지인과의 경쟁보다도 유독 한국인 유학생 사이에서의 위상을 비교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미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학위를 갖는다는 건 단순히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넘어 사회적 지위로 여겨진다는 숨은 뜻을 말이다. 이 경쟁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통과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도 그와 비례하여 달라질 것이란 사실을.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미리 짜여진 각본에 맞춰 진행될까? 중년의 나이가 되다보니 의도치 않게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인 결론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정해진 길을 걸었다고 해서 모범적 각본의 유효한 주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비가시적인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나만 하더라도 기획과 전략으로 촘촘히 형성된 이 세계에 불시착한 '버그'가 아닐까라고 질문하곤 한다. 초가속화된 '대기화된 세계'에 불필요하게 끼어든 것은 아니냐고 자문자답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도 관광을 위해서도 소확행을 위해서도 심지어 쉼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닐까?

송지유는 위의 질문에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답할 것 같다. 졸립다고. 그의 전시 표제 《졸리다》는 다양한 해석을 유도한다. 먼저 졸리다는 호흡과 관련된 낱말이다. 대기의 산소가 부족하면 졸음을 유발한다. 또한 졸리다는 끈이나 줄을 이용해 무언가를 조르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강한 압박은 결국 호흡 부족을 일으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르다의 피동사 졸리다는 치근덕거리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졸리다"는 흔히 쓰이는 표현에서 호흡, 피학, 강요 등의 의미를 내재한다. 에코페미니스트 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ray)는 언어 이전에 숨쉬기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마치 남성중심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 이전으로 돌아가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과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나는 송지유의 졸리다가 관습화된 여성성을 재현하지 않으면서 여성성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anatomy of feminity)를 질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젠더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기보다 우주의 원천이자 생명의 원형으로서의 잊힌 기억을 되찾으려는 시도라 부를 수도 있겠다. 한편 여성을 다룬다고 해서 남성과의 경쟁구도를 의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잊힌 고대의 기억을 좇으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을 남성의 대척점으로 위치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송지유는 가부장제를 당연시 여기는 관습과 선험화된 관념에서 어떻게 탈주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이처럼 남성중심주의화 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한 명의 역할 모델을 발견한다. 바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이다. 작가는 에밀리의 삶을 통해 비이성적이고 보이지 않고 항시적으로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송지유의 작업은 하위적인 것들로 이뤄진다. 이 작업들은 명명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다. 추측하건대, 그의 작업명이 주로 긴 문장인 이유는 작업명과 작업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만큼이나 조형작업과 제목은 각자의 고유성을 부여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시는 작업을 알리기 위한 자리로 보기 어렵다. 《졸리다》는 마치 그간 모인 조형적인 산문시들의 모음집(collection)과 다름없다. 따라서 전시에 찾아온 관람자-독자는 구부러지고 구겨진채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모호한 상태의 안팎을 배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전시인지, 무엇이 작업인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주제가 무엇인지, 무슨 까닭으로 구부러지고 구겨진 채로 엉거주춤하게 비스듬히 머물러 있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사루비아라는 내부의 낡은 면들 사이에 아지랭이처럼 어른거리는 얕은 자몽색 얼룩을 물들이고 그 사이에 신체 기관들을 연상시키는 불완전한 형태를 새겨 넣는다. 간헐적으로 적힌 문장들, 이를테면 "젖은 콧바람", "옆으로 내려간다" 같은 표현은 콧속에 가득한 고름의 찝질함과 찐 더위에 마시는 탄산음료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는 짜릿함과 동시에 뇌가 얼어버린 듯한 매콤함의 기억을 연상시킨다(Listening, 2024). 흰색으로 비균질하게 칠해진 바닥면은 구깃구깃한 페이지가 된다.

​벽에 수채로 그린 두 사람은 V 형태로 이어져 있는데, 이 모양이 마치 남성의 프로필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시킨다 (3,2,1.....). 이와 같은 유기체적 드로잉은 주로 선긋기, 색칠하기, 오리기, 만들기 등이 중첩된 상태로 관습화된 시각예술과 매체의 전형적인 관계를 비틀고 그리기의 행위를 확장하여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면서 그리기와 글쓰기, 서기와 쪼그리기, (허리를) 숙이기와 (아래로) 내려다보기, 오리기와 구멍내기, 보기와 듣기, 지나치기와 머물기 등의 '사이'를 미묘하게 감지하기를 말없이 권유하는 듯하다. 그래서 송지유의 작업은 평면성과 입체성의 전형으로 구분지을 수 없다. 그의 작업은 얇은 막을 공유하고 있으며 매달리거나 기대거나 놓여지는데, 딱히 세워져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주춤거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를 애써 숨기거나 지우지 않는다. 되레 허약해 보이는 것과 달리 작업들은 어떤 부분은 뚝심있어 보이고 또 어떤 부분은 당당해보이고 또 어떤 부분은 해학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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